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두 명의 선수가 등장한다.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는 경기 중에도 계속 이어진다. 선수들은 일대일 맞대결을 통해 승자를 가린다. 프로레슬링의 한 장면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골프 경기의 한 대목이다. 오로지 비거리로만 승부를 가리는 장타 대회인 ‘월드 롱드라이브 챔피언십(WLD)’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WLD는 말 그대로 ‘긴 드라이브샷’을 날리는 대회다. 사용하는 클럽은 오직 드라이버다. 드라이브샷은 남자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적인 골프에서 드라이브샷만큼 역동적인 장면이 또 있을까. 관중들은 호쾌한 드라이브샷에 열화와 같은 함성을 보낸다. 때로는 스코어보다 장타 기록이 더 화제가 되기도 한다.

▶ 43년 역사를 자랑하는 WLD, 지난해부터 국산 브랜드 볼빅이 공인구로 채택

WLD는 역사가 꽤 오래됐다. 지난 1975년 첫 대회가 열린 뒤 43년째 대회가 이어져오고 있다. 2011년부터는 여성 대회도 열리고 있다. 시니어 대회는 2002년 첫선을 보인 뒤 2003년을 끝으로 없어졌지만 2012년에 부활했다. 일본과 유럽에서도 해마다 장타 대회를 개최하고 있지만 WLD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다. 국내에서도 골프존에서 한국 장타 리그를 주최하고 있지만 규모나 화제 면에서 WLD에 비할 바가 못 된다.

WLD는 시즌제로 운영된다. 올해는 10경기가 열리며 절반은 미국 골프채널에서 생중계로 방송된다. 3월에 시즌을 시작해 8~9월경에 ‘왕중왕전’격인 최종전이 열린다. 이 대회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하는 선수에게 시즌 챔피언의 칭호가 주어지고, 챔피언 벨트가 수여된다. 지난해에는 저스틴 제임스가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면서 우승 상금 12만5000달러(약 1억3000만원)의 주인공이 됐다.

제임스는 결승전에서 무려 435야드의 환상적인 드라이브샷을 날리며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우승 직후 제임스의 세리머니도 화제가 됐다. 우승이 확정된 뒤 곧바로 관중석을 뛰어넘어 아내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제임스는 “우승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던 것들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뛰어 올라갔다”며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혼이라 가장 먼저 아내 생각이 났다”고 웃었다. WLD의 룰은 간단하다. 보통 일대일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된다. 한 선수당 4번씩 두 세트, 총 8번의 드라이브샷을 날려 가장 좋은 비거리 기록이 나온 선수가 승리를 하는 방식이다. 슬로 플레이 방지를 위해 선수들은 1분 25초의 샷 클락 안에 4개의 공을 쳐야 한다.

골프채나 복장의 규정은 보통 미국골프협회(USGA)의 룰을 적용한다. 클럽은 USGA 공인 클럽을 사용해야 하며 클럽의 길이는 48인치를 넘으면 안 된다. 티 높이의 제한은 딱히 없다. 일반 골프 경기보다 관중들이 자유롭게 환호성을 지르지만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욕설과 술은 강력하게 제재를 가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공이다. WLD에서 공식으로 지정한 공만 사용이 가능하다. 2016년까지는 캘러웨이의 공을 사용했지만 지난해부터 볼빅이 WLD를 후원하며 볼빅의 무광 컬러볼 ‘비비드 XT’가 공인구로 지정됐다. 그래서 최종전 이름도 ‘볼빅 월드 롱드라이브 챔피언십’이다. 문경안 볼빅 회장은 “일대일 대결에서 서로 다른 색의 공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신의 공을 인식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전까지 컬러 공은 ‘여성스럽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장타 대회를 후원하면서 ‘비거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가 생겼다”고 말했다.

▶ ‘부자(父子)’ 챔피언 저스틴 제임스, 트리플 벨트에 도전하는 팀 버크 등 스타 즐비

볼빅은 지난해 챔피언 제임스를 비롯해 톱 랭커들과 후원 계약을 맺으며 발을 넓혀가고 있다. 타이틀 방어에 나서는 제임스는 WLD 입문 후 2년 만에 정상에 오른 괴물 장타자다. 야구선수로 시작해 피트니스 트레이너를 하다가 장타의 매력에 빠져 WLD에 도전하게 됐다. 태생부터 타고났다. 아버지 게리 제임스가 롱드라이브 챔피언 출신이다. 2005년과 2006년에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프로 레슬러 출신이기도 한 그는 은퇴 뒤 아들의 코치를 도맡아 하고 있다. 제임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샷을 보고 자라서 자연스럽게 멀리 치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제임스는 아버지의 지도 아래 타이틀 방어에 나선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어마어마한 장타를 내뿜는 도전자들이 대권을 노리고 있다. 제임스는 “WLD는 토너먼트 대회이고 단 8개의 공으로 승부를 가린다. 그날의 컨디션이나 잔디의 상태, 날씨 등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쉽게 타이틀 방어를 장담할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성적보다는 우선 만족할 수 있는 파워와 스피드를 내고 싶다. 내가 만족할 만한 비거리를 내다보면 우승은 따라올 것 같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2013년과 2015년 챔피언인 팀 버크는 ‘트리플 벨트’를 노린다. 버크는 지난해 대회에서 아쉽게 벨트를 놓쳤다. 시즌 첫 두 개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하며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최종전에서 3위에 그쳤다. 버크는 “최종전 때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또 벨트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8강과 4강을 치르면서 손목에 통증이 느껴졌고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올해는 우승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버크는 “손목은 더욱 튼튼해지고 헤드 스피드도 더 나오고 있다. 세 번째 벨트를 두르는 것이 목표”라고 의욕을 다졌다. 버크의 최고 헤드 스피드는 시속 154마일(약 247.8km), 최고 볼 스피드는 시속 227마일(약 365.3km)에 달한다. 최고 비거리 기록은 469야드다. 비공식이지만 무려 504야드를 날린 적도 있다. 버크는 “10cm 정도 파울선 밖으로 나가 아쉽게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3년 연속 유럽 장타대회 챔피언(2014~2016년)에 오른 모리스 알렌은 첫 WLD 벨트를 노린다. 최고 비거리 공식 기록이 488야드에 이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장타자다. 2012년에는 스크린골프 최고 볼 스피드(시속 211마일)를 기록하며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렌은 아직까지 WLD 챔피언 벨트가 없다. 지난해에도 3승을 거뒀지만 왕중왕전에서는 32강에 머물렀다. 알렌은 “더 빠르게, 더 세게 치면서 많은 우승을 거두는 것이 목표”라고 다짐했다.




여기에 지난해 데뷔해 4강까지 오른 22살의 신예 카일 버크샤이어와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티칭 프로 자격증을 갖고 있는 시니어 장타왕 제프 크리텐튼도 올 시즌 주목해야 할 선수들로 꼽힌다.

선수들은 WLD의 매력은 ‘파워’라고 입을 모은다. 버크는 “정규 골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 있다. WLD 모든 팬들이 환호하고 열광하는 새로운 골프 경기다. 선수들은 파워풀한 샷으로 보답한다”고 말했다. 스피드도 WLD의 매력이다. 알렌은 “빠른 페이스의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WLD는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대회다. 일반 골프보다 파워풀하고 임팩트 있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경기가 바로 WLD”라고 설명했다. 제임스는 “WLD는 스포츠적인 요소와 쇼 비즈니스적인 요소가 접목된 대회다. 신나는 음악도 즐길 수 있고, 축구와 같이 역동적인 측면도 있다”고 표현했다.

WLD의 2018 시즌 첫 번째 대회인 이스트코스트 클래식은 오는 3월 17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롬비아에서 성대한 막을 올린다. 잠시 기존 골프가 지루해졌다면, 열광적이고 파워풀한 남자의 경기를 보고 싶다면 WLD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8홀에서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을 단 8개의 공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봉근 기자 shin.bonggeun@joins.com